2012년 7월 3일 화요일

[담양 창평중] 스로우시티란?

담양 창평 삼지천 슬로우시티에 대하여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과도하게 진전된 산업화, 대도시화 등으로 인해 기계적인 일상과 시간에 쫓겨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잃어버리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첨단기기에 둘러싸인 생활환경, 오염된 자연환경, 패스트푸드 등에서 벗어나서 전원적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욕망이 점차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속도지향의 사회 대신 느리게 사는 삶을 지향하고, 지역요리의 맛과 향 재발견, 생산성 지상주의 탈피, 환경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 배격 등의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과거로 회귀하여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철학에서 출발한 슬로우 시티(slow city)가 주목을 받고 있다. 슬로우 시티는 지역 환경과 지역 문화 보존을 바탕으로 지정하고 있다.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그 지역에 나는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유로운 옛날의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
 1986년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시작된 여유식(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을 확대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2002년 7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의 시장으로 재직중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씨가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부터 유럽 곳곳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전세계 10개국 93개 도시가 가입되어 있는데, 아시아 지역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전남 4곳(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이 슬로우 시티 국제연맹의 실사를 거쳐 2007년 12월 1일 슬로우 시티로 지정되었다.

2. 창평 삼지천 느림보 마을
고매한 선비의 기상이 서린 천년고을 여행지는 계절마다 나름대로의 매력과 유혹을 지닌다.
사색과 어린 시절 고향집 같은 향수에 젖어드는 여행지가 있다.
바로 문화마을이요, 전통가옥촌, 그리고 덩굴에 휘감긴 돌담길의 풍경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바로 창평고을이다.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오히려 담양고을 보다도 규모가 컸으며 뿌리 깊은 선비의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창평은 전통을 계승하고 학문을 숭상하고, 문무백관을 배출한 대표적 선비 고을이며 충, 효, 예 의 고장으로 충절 정신 또한 투철하다. 임진왜란의 빛난 별 제봉 고경명선생의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11대 孫인 구한말 의병대장 녹천 고광순 의병대장이 태어났다.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연곡사를 야습한 일군에 대항하여 호서 의병장 김동신, 고광순, 윤영기, 신덕순, 고광훈(고광순 의사의 동생) 등이 사력을 다해 싸우다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구례사람들이 세워준 순의비가 지금도 연곡사에 남아있으며 고향 창평에는 포의사를 지어 배향하고 있다.






고광순의 후손으로, 규장각 직각(현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에 돌아와 창흥의숙(현재 창평초등교)을 설립한 고정주등을 배출한 의로운 고장이다.
이곳에서 공부를 한 이들은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등이 있다.
널따란 들녘에는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풍요로운 황금들판이 있고 전원의 그윽한 정취가 느껴진다.
 이런 자연의 혜택으로 넉넉함이 그득하니 인심 또한 후하다. '너른 들'을 가졌다는 창평. 그 이름처럼 풍요로운 들녘에서 얻어낸 소산물이 넉넉하다보니 천석꾼 만석꾼이 많았고 나라가 위급할 때 주저 없이 돈을 내놓았던 지주들이 많았다고 한다.

3. 걸어보고 싶은 고향길, 추억 길
자연의 소산물이 풍요롭다보니 자연스럽게 음식문화도 발달 되었다. 조선시대에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던 창평 쌀엿과 한과를 들 수 있다.
과(菓)라는 말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수로왕조의 기록에 처음으로 제수에 올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귀족들이 즐겨먹던 ‘유밀과’ 과자가 있었다. 유밀과는 불교행사인 연등회 때나 각종 행사에도 반드시 올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다과상으로 올렸으며 훗날 한국의 전통적인 제조방법을 이어받아 오늘날에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사랑받는 한국 전통과자로 거듭나고 있다.
담양한과를 운영하는 박순애 여사도 남도의례음식 명인이다. 남도의례 음식장 최영자 여사도 이곳에서 음식전수관을 열고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창평의 향토음식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창평국밥, 창평안두부, 떡갈비, 한우불고기집, 삼지천 마을동네에 운치 넘치는 한옥식당 갑을원의 오리 요릿집들이 있다. 광주와 워낙 가까운 곳인지라 주말이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고 있으며 결혼식이나 명절날이 되면 창평쌀엿과 한과를 구입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죽염, 죽염된장, 전통 떡갈비등 창평의 특색을 살린 전통음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4. 삼천리 삼지천 마을의 돌담 고샅길 감고 돌아 느끼는 풍경
 옛날 원님 객사자리였던 창평면 사무소에서 골목길로 이어지는 곳으로 들어서면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을 중시해서 문화재청에서 국가 지정 문화재(제 265호)를 하사한 보물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삼천리 삼지천 마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의 옛 세세토록 향토가 깃든 돌담과 고옥이 잘 보존된 마을이 있다. 콘크리트. 시멘트 문화의 뒤켠에서 용케 보존되어 남아있는 돌담 마을들은 세세토록 그윽한 향토의 멋을 지키고 있다. 1510년경부터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창평고씨(昌平高氏)'와 관련된 인물들도 내 고장의 자랑에 한몫을 하고 있다.



삼지천 마을 초입부터 담쟁이 넝쿨로 토석 담을 뒤덮은 골목길을 휘감고 들어가면 고옥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상삼 천과 하삼천 마을까지 약 3.6k까지 이어지는 마을의 돌담길과 부잣집 고옥들이 많다.




삼지내(삼지천)는 천룡의 주산 끝에 천신이 있다는 등, 천룡과 연계되어 ‘천지등’등 기풍이 세고 북소리가 땅에서 울려나와 좋은 골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옛 관헌과 벼슬아치들의 집중적인 마을로 형성으로 그 풍요로움을 드러냈나보다.
담은 주로 토석 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도 토담, 돌담, 전돌을 사용한 담 등 다양한 형태의 담이 혼재되어 있어 보기만 하여도 포근함과 아늑함이 절로 인다. 켜켜이 쌓인 돌담에 핀 야생화. 담쟁이 넝쿨. 자귀나무ㆍ태산목ㆍ 능소화ㆍ채송화ㆍ삼백초ㆍ민들레ㆍ접시꽃ㆍ도라지꽃 자태를 시샘하듯 텃밭에는 고추며. 푸성귀도 무성하고 군대군데 창평엿집들도 있다.
폴폴 흙먼지 일어나는 풋풋한 황톳길을 걸어 본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정겹고 아름답고 소중한 유산이다. 삼지천 마을을 둘러보면 감나무가 흐드러지게 많고 세월만큼 이고 내려온 고옥들의 풍경도 골목 따라 열린다.
전통한옥의 안채나, 처마 안쪽으로 놓인 대청마루, 지붕의 자태 굵직하게 치올린 선의 윤곽과 섬세함에 선현의 지혜와 풍류가 잔뜩 묻어난다. 가을과 겨울풍경이 더 우수에 젖은 더 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고재선 가옥(지방 민속자료 제5호)은 고려 경종1년(916)때 폐사된 대자암 절터에 조선 세조3년(1457) 추제 김자수가 벼슬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상월정을 창건하였다. 그래서 정자라기보다는 사찰의 분위기이다.
김자수는 손자사위인 성풍이씨 덕봉 이경 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이경은 사위인 학봉 고인후에게 다시 양도하여 주었다. 이것이 이 가옥의 내력이다.

마을 동편에 오동나무가 온 산을 덮고 있는 월봉산과 남쪽에 봉황의 머리 부분인 국수 봉이 있어 마치 봉황이 날개를 뻗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형국이다. 봉황의 정기가 서려있다는 월봉산은 오동나무로 온통 산을 덮고 있다.
월봉산 자락에는 개인이 설립한 '달뫼 미술관'이 있고 소담스런 야생화 꽃동산으로 치장한 야생화의 집‘멘트로’식당이 있다.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 남극루(南極樓)가 있다. 이 누각은 1830년대 ‘고광일’ 을 비롯한 30여명이 뜻을 모아 노인들의 편안한 여생을 기원하고 즐거이 지내라는 의미로 옛 창평 관아의 문루를 이축하여 지은 누각이다. 정호는 장수를 기원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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